2023년10월21일 36번
[과목 구분 없음] 밑줄 그은 '만세 시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 ① 순종의 인산일에 전개되었다.
- ② 대한매일신보의 후원을 받았다.
- ③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
- ④ 신간회에서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여 지원하였다.
(정답률: 55%)
문제 해설
정답> ③
'스코필드, 제암리 학살 사건을 폭로하다'는 제목 아래 '논둑길을 돌아서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을은 불타버렸고 아직도 여기저기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1919년 학생과 시민들의 만세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자 일제는 경찰과 군인을 동원하여 탄압하였다. 화성 제암리에서는 주민을 교회에 몰아넣은 후 총을 쏘고 불을 질렀다. 소식을 듣고 달려간 스코필드는 제암리에서 벌어진 학살을 세계에 폭로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밑줄 그은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에 일어난 3·1 운동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프랭크 스코필드(1889~1970)는 영국 태생의 캐나다 의학자(선교사이기도 함)로, 3·1 운동 당시 일제가 저지른 제암리 학살 사건*(1919.4.15)의 참상을 외국 언론에 제보하여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한 인물이다[한국 이름 석호필(石虎弼)]. 1916년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교수로 내한하였다가 3·1 운동 당시 위와 같은 일을 하였다. 1968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받았으며, 국립 서울 현충원에 안장된 최초의 외국인이기도 하다.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소재 제암리 감리교회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으로, 당시 일제 군경이 무고한 양민을 교회당 안으로 몰아넣은 후 문을 잠그고 집중 사격을 가하여 28명을 학살하였다(이후 교회당 방화). 그리고는 다시 부근의 채암리로 가서 다시 민가를 방화, 31호를 불태우고 39명을 또다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3·1 운동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1919.4.11).
오답 해설>
① 순종[재위 1907-1910, 제27대(대한 제국 제2대 황제)]의 국장[인산일]에 전개된 만세 시위는 6·10 만세 운동이다(1926.6.10).
② 대한매일신보의 후원을 받은 운동은 대구에서 김광제(1866~1920), 서상돈(1850~1913) 등의 발의로 시작된 국채 보상 운동이다(1907.2~1908.7).
④ 신간회에서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여 지원한 운동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다(1929.11). 신간회 중앙 본부에서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계기로 삼아 언론 및 종교 세력, 청년 및 노동 단체 등과 함께 대규모의 민중 대회를 준비하였으나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조병옥, 이관용, 허헌 등 다수의 간부들이 체포되었다(1929.12.13, 이른바 '민중 대회 사건').
'스코필드, 제암리 학살 사건을 폭로하다'는 제목 아래 '논둑길을 돌아서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을은 불타버렸고 아직도 여기저기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1919년 학생과 시민들의 만세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자 일제는 경찰과 군인을 동원하여 탄압하였다. 화성 제암리에서는 주민을 교회에 몰아넣은 후 총을 쏘고 불을 질렀다. 소식을 듣고 달려간 스코필드는 제암리에서 벌어진 학살을 세계에 폭로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밑줄 그은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에 일어난 3·1 운동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프랭크 스코필드(1889~1970)는 영국 태생의 캐나다 의학자(선교사이기도 함)로, 3·1 운동 당시 일제가 저지른 제암리 학살 사건*(1919.4.15)의 참상을 외국 언론에 제보하여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한 인물이다[한국 이름 석호필(石虎弼)]. 1916년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교수로 내한하였다가 3·1 운동 당시 위와 같은 일을 하였다. 1968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받았으며, 국립 서울 현충원에 안장된 최초의 외국인이기도 하다.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소재 제암리 감리교회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으로, 당시 일제 군경이 무고한 양민을 교회당 안으로 몰아넣은 후 문을 잠그고 집중 사격을 가하여 28명을 학살하였다(이후 교회당 방화). 그리고는 다시 부근의 채암리로 가서 다시 민가를 방화, 31호를 불태우고 39명을 또다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3·1 운동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1919.4.11).
오답 해설>
① 순종[재위 1907-1910, 제27대(대한 제국 제2대 황제)]의 국장[인산일]에 전개된 만세 시위는 6·10 만세 운동이다(1926.6.10).
② 대한매일신보의 후원을 받은 운동은 대구에서 김광제(1866~1920), 서상돈(1850~1913) 등의 발의로 시작된 국채 보상 운동이다(1907.2~1908.7).
④ 신간회에서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여 지원한 운동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다(1929.11). 신간회 중앙 본부에서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계기로 삼아 언론 및 종교 세력, 청년 및 노동 단체 등과 함께 대규모의 민중 대회를 준비하였으나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조병옥, 이관용, 허헌 등 다수의 간부들이 체포되었다(1929.12.13, 이른바 '민중 대회 사건').